2011년 9월 4일 일요일

창조론자들이여, 과학과 다투지 말라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창조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짓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창작물이며, 그분의 의도대로 만들어졌다.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당연히 그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반하여 사람은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장구한 시간이 흘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앞의 논리를 창조론이라고 하고, 자기들의 논리를 진화론이라고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너무 상반되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둘 중에 하나가 참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올해(2010)가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이라고 한다. 초창기에 비록 혁명적인 발상이기는 하나 허술한 가설(假說) 같았던 진화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치밀한 과학적 논거를 바탕으로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말해 제2의 다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화론을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고고학, 인류학, 우주과학, 지질학, 생명과학 등이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신비를 속속 파헤치고 있으며,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창조론은 거의 설 자리를 잃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알았던 해와 달은 우주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생물들에게 살라고 주신 땅은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 불과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복제가 가능하며,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할 수도 있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생물을 만들 수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과 별로 여행할 수도 있고, 손바닥보다 작은 전화기로 언제 어디서라도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런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자들은 여전히 진화론은 허구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우긴다.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진위를 논할 생각이 없다. 그럴만한 과학적 지식도 부족하다. 추호도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생각 또한 없다. 다만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논쟁(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과 종교(신앙이라고 해도 좋다)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며,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창조론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의도를 자연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이사야 45:9)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토기장이와 진흙과 같다. 위의 말씀은 진화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창조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하지 않는다. 기분 나쁘지만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는다. 그들은 물질세계의 구성과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알고자 한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막지마라. 그것은 사탄의 사주도 아니며, 바벨탑을 쌓는 행위도 아니다.
 
물론 진화론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진화론에도 허점은 많다. 어쩌면 창조론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창조론으로 성경이 과학적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그 방주에는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 올려서 덮고, 방주의 옆쪽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서 세 층으로 만들어라.(창세기 6:14-16)
 
창조론자들은 물이 지구를 다 덮은 대홍수가 정말 있었으며, 따라서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위의 크기 정도면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종류별로 다 탈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지질 조사를 실시하고, 노아의 방주가 워낙 컸기 때문에 어딘가에 흔적이라도 남았을 것이라며 고고학적 탐사도 서슴거리지 않는다.
 
아서라.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그 옛날 타락한 세상에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했듯이 이 혼탁한 시대에도 의인은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곧 노아의 방주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달 덕분에 인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암의 정복도 멀지 않았고, 노화를 늦출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TV, 냉장고, 자동차, 비행기, 빌딩, 컴퓨터 등은 얼마나 더 발달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과학은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경을 빌미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진화론자들을 포함한 과학자들에게 부탁한다. 성경을 과학의 창을 통해 바라보지 말라.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픽션이라느니, 틀렸다느니 운운하며 트집을 잡아서도 안 된다. 성경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2011년 4월 21일 목요일

[한겨레신문] ‘교회 장사’, 비과세 혜택 없애라

한국교회, 드디어 '장사한다'는 험한 말까지 듣다.
예수님의 첫 말씀이 가슴에 사무친다.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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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매매가 개신교계 안에서 공론화된 지는 이미 오래다. 매각 당사자, 혹은 목사와 신도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때나 거론될 정도로 일상화됐다. 교회가 중요한 돈벌이 대상이 되고, 시장까지 형성돼 있으며, 전문적인 장사꾼과 브로커가 활개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선 교계 내부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공정사회 차원에서 일정한 사회적 규범을 적용할 때가 됐다.
 
물론 교회 부동산이나 시설도 매매될 수 있다. 문제는 비영리법인으로서 온갖 면세 혜택을 받는 교회가 순전히 장삿속으로 매매되는 경우다.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이런 매물 광고는 비일비재하다. ‘대지 600평, 건축 700평, 예배당 600석, 출석 장년 성도 500명, 매매가 35억(절충 가능)’. 눈에 띄는 건 ‘출석 장년 신도’ 현황이다. 단순한 부동산 매매라면 이런 내용이 포함될 리 없다.
 
식당, 술집, 이·미용실, 목욕탕 등 대중업소를 매매할 때 값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고객 수와 매출 및 수익 규모다. 이런 대중업소의 고객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출석 장년 신도다. 안정적으로 출석해 헌금을 꼬박꼬박 내는 층이다. 유·청·노년 수를 뺀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에게 붙은 1인당 권리금은 100만원 이상이라고 한다.
 
교회는 소득세, 상속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 무려 19개 세목에서 특례 혜택을 받는다. 영리가 아니라 공익에 기여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사업에 지출하는 규모는 수입의 단 3%뿐이며, 그것도 선교의 일환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차익이 목사 등 소수 운영자의 수중에 고스란히 돌아가는 교회 매매에까지 세금을 매기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 매매가 은퇴 후 생활자금 마련에 이용되고, 대여섯번씩 교회를 팔아 막대한 차익을 실현하는 경우도 나온다.
 
교회 안의 성장주의와 물신숭배, 압도적 공급초과 상태인 목회자 수급 불균형, 불안한 은퇴 후 대책 등이 이런 반종교적이고 부정한 교회 매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사회가 나설 일이 아니다. 교회가 장삿속에 매매되고, 그 결과 발생한 수익이 몇몇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상, 사회정의 차원에서 국가가 과세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야말로 공정한 사회로 가는 작은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 사설
2011. 4. 21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교회 부패의 근원을 모르는 어리석은 한기총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에 싸움이 났다. 한두 번 난 싸움도 아니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한국기독교가 무너져 가는구나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이다.

한기총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일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대들보 같은 조직이다. 1989년에 설립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갈수록 심해지자 자성의 차원에서 ‘합동’, ‘통합’ 등의 대표적인 교단이 협의기구를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교단의 분열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아마 문화관광부의 종교단체 등록 담당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기총의 하는 일이란 회장 뽑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구제도 하고, 구국기도회도 열지만 다 얼굴내기 위한 수준이다. 그러나 회장은 한 번 해볼 만하다. 이번에도 싸움 끝에 어느 분이 회장에 당선되셨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그분의 취임식에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대신 보내 축하했다. 큰소리도 치고, 꽤 행세도 한다.

이 단체는 그나마 하는 일이 회장 뽑는 것 밖에는 없는데 그것도 가끔씩 말썽이 난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목표로 설립된 단체가 선거 때가 되면 내 편 네 편으로 패가 쫙 갈린다. 음해(陰害), 모략(謀略)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돈다발이 돈다. 선거 전문 거간꾼목사들이 등장하여 매표행위(買票行爲)를 서슴지 않는다. 정치판에서도 사라진 금권선거가 버젓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횡횡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임 이광선 목사의 고백은 사실 놀랄 사건도, 새로운 사건도 아니다.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세칭(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이광선 목사 양심선언’도 결국 회장 권력을 두고 벌인 패싸움의 부산물일 뿐이다.

한국교회의 추락은 끝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추락에 제동을 걸만한 제어장치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추락의 끝은 결국 파멸일 것이다. 자.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먼저 부패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근원을 수술해야 한다.

나는 부패의 제일 근원을 잘못된 목사배출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당사자들은 목회자라고 함)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가 목사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은혜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함량미달의 지도자에게 자기 백성의 생명을 맡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한가? 특별한 자격은 필요 없다. 그저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자기 의지만 있으면 된다. 여기저기 널린 것이 신학교다. 입학도 쉽고, 졸업도 쉽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연간 엄청난 숫자의 목사 자격증 취득자가 배출된다. 그리고 직장을 찾는다. 전도사, 부목사 자리는 흔치 않다. 미취업자도 꽤 많다. 용기가 있거나, 재력이 있으면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개척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에게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병리현상을 이해하고 치유할 안목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지식사회를 살아갈 교양도,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도 부족하다. 과학기술이나 우주나 자연을 설명할 능력도 태부족이다. 물질문명에 대응할 논리도 없고, 황금만능주의 경제관에 일침을 가할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성경은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하나님의 뜻은 왜곡되어 전달된다. 교회에는 은사주의(恩賜主義), 기복신앙이 만연하게 된다. 세속적인 번영신학이 판친다.

어제 종로 조계사에서 노인 몇 분이 "중들 나와라. 예수를 믿으라."며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이들 일행은 대웅전 앞에서 메가폰을 들고는 "하나님 때문에 밥 먹고 사는 거다. 부처가 비를 주냐. 비가 와야 농사짓고 밥 먹는 거다."라고 했단다. 부끄럽도다. 이런 사건이 연일 터지는데도 한국교회는 감투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한기총은 당파 싸움 그만하고, 부패의 근원을 과감히 수술해야 한다. 이제라도 목사의 자질을 제고(提高)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목사배출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이광선 목사] 한국교회에 드리는 참회와 호소의 글

이 글은 공감해서 올린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치부가 잘 묘사되어 있기에 반성과 개혁의 소재로 삼고자 전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사랑하는 한국교회 성도들, 그리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지도자 여러분. 주후 2011년 설 명절을 잘 지내시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연휴기간에 홍전신일기도원에서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속히 이 무거운 십자가, 한기총 대표회장직을 적법절차에 따라 인수인계한 후 얼마 남지 않은 목회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한기총의 전임(前任) 대표회장으로서 한기총이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40여 년간 즐겁게 목회를 해왔지만 그러나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나라가 잘 되려면, 한국교회가 잘 되어야 하고 한국교회가 잘 되려면 한기총이 새로워져야 함을 통렬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70년대에만 해도 교회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 국민이 교회를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민주화를 위해 교회가 고난당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바깥 사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 왔지만 교회는 거의 개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한심하게 비쳐져 교회를 찾아오는 발길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개교회주의에 안주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성장제일주의, 물질만능주의, 상업주의로 비쳐졌고 교단은 분열을 거듭하여 그 이름도 모를 지경입니다. 더욱이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금권선거가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비뽑기로 총회장을 선출하는 제도가 아직도 존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복음이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70년대나 3.1운동 당시처럼 사람들이 자기발로 교회에 찾아오도록 하려면 교회는 뼈를 깎는 자세로 자기혁신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기총부터 개혁되어야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청와대가 개혁의 사령탑이라면 교회에서는 한기총이 개혁의 사령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한기총은 개혁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기총 대표회장 자리는 교회 지도자들이라면 누구든 한 번씩 거쳐 가기를 원하는 명예의 자리였을 뿐입니다. 그 결과 한기총은 냉소와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가장 개혁되어야 할 단체로 지목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총 대표회장에 출마했던 이유는 한기총 개혁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출마했을 때 저는‘양심과 법 규정’에 따라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저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지지로 쓰라린 패배를 겪었습니다. 깨끗한 선거를 하면 반드시 패배하는 것이 현재의 한기총 선거풍토입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 저는 달포 동안 고난과 고통 중에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년에는 흙탕물에 빠져서라도 대표회장이 되어 한기총의 개혁을 이루겠습니다.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위에서도 “목사님, 이번에는 남들처럼 하십시오. 그리고 당선직후부터 금권선거를 추방할 제도개혁을 꼭 이루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저는 압도적 표차로 대표회장이 되었습니다.
 
대표회장이 되자마자 저는 한기총 변화발전위원회를 두고 개혁의지가 강한 최성규 목사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정관, 시행세칙, 선거규정의 개정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행위원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금권선거는 한기총에서 영원히 추방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개혁을 담고 있는 개정안에 대한 이해부족, 이해관계, 집단 이기심 등에 휘말려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제 능력과 정치력이 부족해서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기총 개혁을 염원했던 많은 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대표회장 임기를 마치면서도 재선 도전을 심각하게 고민했었습니다. 한기총 개혁노력이 허망하게 끝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합동측이 대표회장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이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강직하고 의로우신 합동측 김동권 목사님이 이 개혁을 대신 이루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김동권 목사님도 결국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지지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뻔히 예상된 결과였습니다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기총 선거과정에서의 불법의 문제를 가지고 30여 명의 교단 총무들과 백여 명의 실행위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분들은 지난 1년 간 제가 한기총을 개혁하려고 애썼던 모든 과정을 전부 지켜본 분들입니다. 그리고는 선거불법을 절대로 좌시하면 안 된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나서 주셨습니다. 저는 이 분들을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낙심하여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 분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기총을 개혁하지 않으면 한기총의 환부는 더 깊어 질 것입니다.
 
1월 20일 오후 2시 총회에서 의장이 심한 소란으로 정회를 선언하고 1월 27일 오후 2시에 속회를 할 것을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원천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회의장을 나간 후에 불법으로 회의를 강행한 사람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해임된 사람을 의장으로 세워, 선거위원 전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결의한 길자연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날치기 인준했습니다. 정관에 따라 실행위원회에서 통과됐어도 총회에서 인준을 부결할 수 있는 법을 무시하여 한기총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더욱이 정관에도 없는 한기총 상임위원장 숫자를 배로 늘려 자기 파 사람들을 심었고, 정관에 위배되는 임원들을 마구잡이로 임명했습니다. 이번에 교단 총무들이 결연히 일어선 이유도 이러한 행태를 보고,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선거에서 이겼으니 저 역시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거풍토를 고치지도 못했으니 저는 정말로 나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고목에서 새싹이 돋듯, 한기총의 곪아 터진 자리에서 새 살이 돋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젊은 목사들의 개혁의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한기총에도 자정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곳 홍천기도원을 끼고 흐르는 홍천강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물소리에 봄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기총에도 반드시 봄이 올 것입니다. 한기총을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아니한 남아있는 선지자 7천 명의 기도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한기총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걱정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개인의 세력 싸움이나 교권싸움이라고도 하고, 합동과 통합 간의 갈등으로 보기도 하고, WCC 총회에 대한 입장차이로 보기도합니다. 그리고 한기총이 둘로 깨지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진통은 한기총에서 새 살이 돋아나오기 위한 진통일 뿐입니다. 개혁과 반개혁의 싸움입니다. 한기총에서 교단총무들이 개혁의지를 가지고 지금처럼 결집한 적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기필코 개혁에 성공해야 합니다.
 
저는 최소한 다음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대표회장은 교회 목사님들이나 교단 총회장님들이 은퇴하기 전에 거쳐 가는 명예직이 되면 안 됩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 개혁의 사령탑이 되어야 하고 일하는 한기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다시 우리 국민의 존경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존경받는 목사님이 대표회장에 선출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금권에 휘말리는 실행위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살고자 분투하는 교회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재개발과정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는 1만2천개 교회의 고통을 대변하고 작은 교회의 아픔을 이해하고 돌보며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제 몸처럼 섬기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가장 존경받고 능력 있는 분들로 상임위원장과 임원진, 특별위원장 그리고 서무처를 다시 구성해야 합니다.
 
다섯째, 한기총은 각 지역 기독교연합회를 한기총의 틀 안에 포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역 기독교연합회와 교회들이 이 사회에 대한 거룩한 책임을 잘 감당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러한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 한기총 대표회장의 개혁의지가 제아무리 명확하더라도 개혁노력이 얼마든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제가 뼈저리게 깨달은 점은 한기총 내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기총은 개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깥에서 한기총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점이 개혁운동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부터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개혁을 가로막는 원흉임을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痛悔自服)해야 합니다. 개혁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개혁에 나서는 이유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정죄하기 위해 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회개하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통회자복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죄의 고백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한국교회를 향한 비난이 빗발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끄러운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는 한국교회는 절대로 개혁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혁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고뇌를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반성할 점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저 자신부터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데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그런 자세로 가야 함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도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고 개혁운동에 동참한다면, 그리고 동참의지가 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손을 잡고 한기총 개혁에 함께 나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적법절차에 따라 한기총 대표회장 직분을 훌륭하게 수행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지금의 법적 대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혁의지가 없음이 확인되어 법적 대응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도 다같이 승리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이에 저는 한기총의 개혁을 염원하는 모든 목회자들, 기독교 원로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국교회와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도회’를 2월 17일(목) 오후 7시에 종로5가 100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기도회 후 <한기총 개혁을 위한 기도모임>을 결성하여 계속적인 기도운동과 더불어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오니 적극 참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설날 새벽에
한기총 제22회기 정기총회 속회에서 새 대표회장 선출 때까지
대표회장 직무를 연장 받은 이광선 목사 드림

2011년 2월 7일 월요일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곧 낙원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194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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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柱는 기독교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기독교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을 모르면 윤동주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위의 시에는 두 개의 장소가 서로 대립구조를 이루고 있다.
 
‘고향’과 ‘또 다른 고향’
 
그의 고향은 이 세상이다.
그의 또 다른 고향은 낙원이다. 하늘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풍진세계(風塵世界)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또는 우리)는 백골이다.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그래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백골이다.
어둠 속에서 풍화작용에 살점하나 남지 않은 백골은 에스겔(37장)에 나오는 골짜기에 누워있는 ‘마른 뼈들’이다.
 
나는 어두운 밤, 어두운 방에 누워있다. 창밖으로 별이 쏟아지며 망망한 우주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 때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하늘에서 나를 부르는 천사의 노래다. 세상에 한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시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아름다운 혼’은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영혼이다. 또 다른 고향, 곧 낙원으로 가려는 그의 영혼이다. 낙원은 ‘또 다른 고향’이라기보다는 원래 고향이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타향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세상도 사랑했다. 이곳에는 육신의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 그래서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러다보니 마지막에 돌아 가야할 본향을 ‘또 다른 고향’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백골과 아름다운 혼 사이에서 방황한다. 갈등에 울고 있다. 그의 눈물은 백골과 작별하고 또 다른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회개의 눈물이다. 아니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일지도 모른다.
 
어둔 방에서 번민하는 시인의 귀에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누군가의 집 앞을 나그네가 지나가나 보다. 도회지 사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광경을 잘 이해못할지도 모르겠다. 시골에서는 밤중에 인기척이 나면 개가 짖는다. 밤공기를 가르며 짖어댄다. 한 마리가 짖으면 동네 개들이 덩달아 여기저기서 짖어댄다.
 
시인은 곤한 밤을 깨우는 개 짖는 소리에서 이 물질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지조 높은 개’는 무엇인가? 잘난 체 우쭐거리며 살아가는 속물들이다. 썩어져갈 우상(偶像)들이다. 탐욕에 눈이 멀어 평생을 어둠 속에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들’이다. 개들이 짖어대는 시끄러운 소리는 밤새 그칠 줄을 모른다. 당연하다. 인간군상(人間群像)의 욕망에 어디 끝이 있으랴.
 
내가 사는 곳은 먹잇감을 두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개들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어둠을 벗어나야 한다.(‘지조 높은 개’를 애국지사라느니, 시인을 일깨우는 존재라느니 하는데 개는 돼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부정적인 동물로 취급된다. 좋은 시를 함부로 훼손하지마라. 시어에서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아무려면 고고한 지사를 개에 비유했겠나?)
 
시인은 어쩌면 dark(어둠. 어두운)와 bark(개가 짖다. 개 짖는 소리)를 나란히 놓음으로 은연중에 英文 운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시인은 길을 나서기로 한다. 쫓기듯이 서둘러서 길을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시인은 백골을 버리고 갈 수가 없다. 백골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가 없다. 시인은 그렇게 무정(無情)한 사람이 못된다.
 
그래서 백골 몰래 가기로 한다. 제발 백골이 깨지 말아야 할 텐데.

인생길 복낙원입니다

Marc Chagall, Adam and Eve expelled from Paradise, 1967
 

復樂園(Paradise Regained)은 잘 아시다시피 밀턴(John Milton)이 1671년에 펴낸 서사시입니다. 失樂園(Paradise Lost)의 후편이지요.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낙원(또는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어디로 추방되었느냐고요?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世上이지요.
 
우리 인생은 무엇입니까?
고달픈 인생의 종착지는 어디입니까?
우리 인생은 우리가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넉넉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밀턴이 정확히 보았습니다.
인간은 낙원을 잃었고,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한다고.
 
본향(本鄕)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순례자(巡禮者)입니다.
 
멋진 시 한편을 같이 낭송해 봅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하늘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같은 존재입니다. 소풍은 즐겁지만, 그러나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낙원 가는 나그네 인생,
어찌 살렵니까?

2011년 2월 6일 일요일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말고 사랑하라(4)

전도의 본질은 사랑이다
 
일부 교회의 전도방식은 특이합니다. 그들은 마치 축귀(逐鬼)하듯이 전도하고, 전쟁하듯이 전도합니다. 먼저 전도의 목표를 정합니다. 목표는 지역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고, 기관일수도 있겠죠. 정해진 전도대상은 현재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그 대상을 악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전도란 곧 악의 세력과의 한판 전쟁입니다.
 
그들은 이런 전도방식의 근거를 구약성경 여호수아에서 찾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山地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Anakim)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다.” 부흥을 원하는 교회가 단골로 내거는 구호가 ‘이 山地를 내게 주소서’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전도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곳곳에서 부닥치게 되는 훼방꾼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인생길에서 우리는 숱한 난관을 만납니다. 그 난관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우리는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즉, 산지란 우리 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할 난관을 말합니다.
 
이런 전도방식은 평화를 깰 우려가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내리다.’ 식의 전도는 적과 동지를 가르게 됩니다. 우리만 옳고, 우리만 구원 받는다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부각시켜 오히려 전도를 방해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좀 길지만 그분의 전도방식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님의 전도방식은 고침입니다. 낮고 누추한 곳으로 내려가셔서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장애를 치유하시고, 토색(討索)하고 간음(姦淫)한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의 본질은 결국 사랑입니다. 전도하고 싶습니까? 눈물이 있는 곳으로, 고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십시오.
 
감히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마십시오. 사랑하십시오. 한국교회에는 이미 일천만 성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면 족합니다. 전도보다는 허물어진 교회의 담장을 보수(補修)해야 할 때입니다. 바리새파를 척결해야 할 때입니다. 배금주의를 혁파해야 할 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전도의 비결을 알려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불신지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전도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사랑에 치중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많은 교회와 예수님 마음씨를 가진 성도님들께 한국교회라는 총칭(總稱)을 사용하여 심려를 끼친 점 용서바랍니다. 아울러 ‘땅 밟기’ 사건으로 마음이 아팠을 불교계에도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사과드립니다.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말고 사랑하라(3)

우상과 벗하는 한국교회
 
예수님은 한 번도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에도 우상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는 아무도 우상숭배를 안 했으니까.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시아, 그리스, 로마 곳곳에는 神堂과 神像이 즐비했습니다.
 
예수님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신상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가득 차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물, 곧 맘몬(Mammon)입니다. 그래서 맘몬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財物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숭배하지 말아야 할 우상은 재물입니다.
 
한국교회는 만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병의 증상은 많이 모으고, 크게 짓고,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합니다. 교회당을 번듯하게 짓습니다. 십일조를 강요합니다. 교회성장 세미나는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개최되고, 그곳에 가면 으레 급성장한 교회의 목사들이 성공사례를 자랑스레 늘어놓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특히 강조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일단 교인이 늘어야 헌금도 늘고, 헌금이 늘어야 교회 증축도 가능하기 때문이죠. 전도는 軍事作戰처럼 전개되기도 하고, 다단계판매방식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 선물은 필수적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미 만성이 된 이 병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부여받은 사명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전도, 전도 하건만 한국교회는 이미 10여 년 전에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교회 수는 증가하나 교인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여러 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貪心)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라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인 수가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교회, 십일조 잘 내면 부자 된다는 식의 설교를 하는 교회는 이미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진 교회입니다. 우상과 벗하는 교회입니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듣고 있던 자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가 큰 부자였거든요. 교회는 청빈(淸貧)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빈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말고 사랑하라(2)

現代版 바리새인이 되려는가?
 
한국교회는 ‘善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노상강도(路上强盜)를 만나 죽게 된 불쌍한 사람을 누가 거두었습니까? 제사장(祭司長)이었나요? 레위 사람이었나요? 그들은 모두 보고도 못 본체 지나갔지만 홀대받던 사마리아인만은 데려다가 정성껏 치료해주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성경대로 사는 정통파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사요, 장로요, 신실한 집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껍데기 믿음보다는 믿음의 알맹이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예수님의 황금률(黃金律)을 교회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만 알고 정작 그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잊은 듯합니다.
 
한국교회에는 평화, 용서, 사랑, 나눔, 섬김, 평등 등 기독교의 진리 구현에 충실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애쓰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그런 것들보다 더 우선시하는 가치가 있으니, 바로 전도입니다. 한국교회는 전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믿음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이나 전도했느냐가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섬김과 나눔을 기리는 상은 없어도 전도 잘했다고 주는 상은 어느 교회나 있습니다. 교회의 지상목표는 부흥입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교회를 건축하고는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합니다. 교회의 역량은 전도에 집중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진리를 구현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맙니다. 부흥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는 이제 부흥을 멈추었습니다. 교회로 오는 발걸음보다 교회를 떠나는 발걸음이 많습니다. 어찌하렵니까?
 
유럽의 열강들은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무고한 원주민들을 수도 없이 죽였습니다. 대부분의 종족이 멸절되었습니다. 정복자들 옆에는 선교사가 있었고, 정복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경(地境)이 확대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교회는 갈수록 쇠퇴하고 있습니다. 고색창연한 교회에 교인은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합니다. 한국교회는 피로 얼룩진 유럽교회의 宣敎 歷史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돌기둥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구약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봉은사에 간 청년들은 이 말씀을 신봉하여 우상이 파괴되길 기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의 전능함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분 대신에 섬기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부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미물(微物)에 기대어 인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노하실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이셨지만 아주 싫어한 부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라는 형식주의에 빠져 정작 그 율법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죽하시면 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했을까요. 한국교회가 아직도 성경을 바리새인처럼 읽는다면 큰일입니다.
 
청년들이 신봉한 레위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 레위기에는 이런 식의 율법이 잔뜩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돼지고기는 안 먹습니까?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봉은사에 간 청년들과 그들의 지도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자, 율법주의에 눈이 어두워가는 한국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여, 전도하지 말고 사랑하라(1)

二分法의 함정에 빠진 한국교회
 
인터넷을 통하여 ‘봉은사 땅 밟기’라는 해괴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채 몇 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 차마 끝까지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우리나라 유수의 사찰인 봉은사에서 손을 높이 쳐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그들의 앳된 얼굴을 보자니 부끄러움에 더하여 ‘누가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나?’라는 참담함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다 그들을 잘못 인도한 지도자의 잘못입니다. 성경 말씀을 곡해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발적인 실수가 아닙니다. 이 사건을 한국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불교계에 사과했습니까? 앞으로 종교간 화해를 위해 노력하겠습니까?
 
글쎄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는 적과 동지 둘 중의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는 미신이며, 타파의 대상입니다. 타 종교의 신도들은 아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다보니 자칫 잘못 걸리면 異端이요, 사탄이며, 적그리스도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한국교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무신론자(無神論者)도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도 末路는 지옥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경전을 쓰며, 같은 예수를 믿는 가톨릭도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한국교회를 보노라면 중세의 십자군(十字軍)이 연상됩니다. 섬뜩합니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기 위하여 200년간 무려 8번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군전쟁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줍니까? 침탈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고, 타 종교를 무시하는 행위를 예수님은 단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 강토를 짓밟고 무고한 백성을 죽인 왜군 수령입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도였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장군이 일본에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을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고니시의 군기(軍旗)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십자군의 그것처럼. 그는 조선 침략을 성전(聖戰)으로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 침략이 옳았습니까? 하나님의 군기를 높이 쳐든 고니시와 그 병졸들은 하늘나라 가고 무참히 죽어간 우리 국민들은 다 지옥 갔습니까? 유교의 충(忠)을 이념으로 삼아 결사 항전한 조선군과 의병들은 이교도(異敎徒)들인데 그들은 다 어찌되었습니까?
 
인류는 그런 과오를 더 이상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종교간 상호존중과 이해가 곧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태 전 겨울, 서대문에 있는 다락방에서 베다니 학원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연사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목사의 부인되는 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강연을 하면서도 이상한 착각에 속으로 갸웃거렸다. 여러 청중 속에 대여섯 사람쯤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꼭 만난 사람들 같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주관하던 법회였든지, 아니면 출가 이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분들이었든지. 어디서 본 얼굴들 같은데 도무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그 얼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얼굴들은 실제로 어디서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이 밖으로 번져 나옴으로 해서, 기왕에 알았던 사람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전생에 이웃에서 살던 사촌들이었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있는 ‘진리는 하나인데’라는 수필의 일부입니다. 이 자리에서 케케묵은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논란을 다시 꺼내 들 생각은 없습니다. 불교를 추켜세울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그 종교의 본질은 평화요, 자비요, 겸손입니다. 예수님도 이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죽음으로 그것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분법의 함정에서 속히 헤어나야 합니다. 교회 밖에도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사

하루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함을 깨어 본 바이런은 행복스러운 자이었다. 마는 하룻저녁에 ‘아무런대도 조선인이로구나!’ 하고 연락선 갑판을 발구른 자는 둔한 자이었다.
 
나는 학창에 있어 학욕에 탐취하였을 때에 종종 자긍하였다. ‘학문엔 국경이 없다’고. 장엄한 회당 안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경청할 때에 나는 감사하기가 비일비재이었다. ‘사해가 형제 동포라’고 단순히 신수(信受)하고, 에도(江戶) 성의 내외에 양심에 충(忠)하고 나라를 애(愛)함에 절실한 소수자가 제2국민의 훈도(薰陶)에 망식몰두(忘食沒頭)함을 목도할 때에 나의 계획은 원대에 이르려 함이 있었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하랴?’고. 과연 학적(學的)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애적(愛的) 충동에는 사해가 흉중의 것이었다. 이상의 실현에 이르러는 전도에 다만 양양할 뿐이었다. 때에 들리는 일성(一聲)은 무엇인고? ‘아무리 한대도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무량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는 구(句)가 달리 있으랴. 이를 해(解)하여 만사휴(萬事休)요, 이를 해하여 만사성(萬事成)이로다. 이에 시선은 초점에 합(合)함을 얻었고 대상은 하나임이 명확하여지도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대언(大言)치 못하나 조선과 자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무엇’을 지득(知得)함이 있는 줄 믿노라. 그 지만(遲晩)함이야 어찌 남의 웃음을 대(待)하리오만.
 
그러나 자아를 위하여 무엇을 행(行)하고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계(計)할꼬. 오직 비분개세(悲憤慨世)만이 능사일까. 근일 우리 형제들 사이에 그 평소의 사상이 상반(相反)하고 경일(頃日)의 취향이 각이(各異)함에 불구하고 각기 자아를 굽히고 동일의 표적을 향하려는 경향이 보임은 우리의 공하(共賀)할 바거니와 이는 실로 친거(親去)후에 효성이 동(動)함과 일리(一理)이니 우리 불효자인들 어찌 그 예(例)에 빠지랴. 경우는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동일한 최애(最愛)에 대하여서도 그 표시의 양식이 각이함은 부득이한 세(勢)이라. 우리는 다소의 경험과 확신으로써 오늘의 조선에 줄 바 최진최절(最珍最切)의 선물은 신기치도 않은 구신약성서 한 권이 있는 줄 알 뿐이로다.
 
그러므로 걱정을 같이 하고 소망을 일궤(一軌)에 붙이는 우자(愚者) 5-6인이 동경(東京) 시외 스기나미촌(杉竝村)에 처음으로 회합하여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고 매주 때를 기(期)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강(講)하면서 지내온 지 반세여(半歲餘)에 누가 동의(動意)하여 어간(於間)의 소원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도다. 명명(命名)의 우열과 시기의 적부(適否)는 우리의 불문(不問)하는 바라.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기원(祈願)은 이를 통하여 열애의 순정을 전하려 하고 지성(至誠)의 선물을 그녀에게 드려야 함이로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所持)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 사람을 기다려 면담하라, 상론(相論)하라. 동지(同志)를 한 세기 후에 기(期)한들 무엇을 탄할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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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님이 쓴 <聖書朝鮮> 창간사입니다. 빼어난 문장입니다. 때는 1927년 7월. 그 분의 나이 이제 만 26세였으니, 일본에 짓밟힌 조국 강토를 바라보며 피 끓는 젊음으로 하나님 앞에 소리치며 서원하는 그의 모습이 선합니다.
 
다만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조선’ 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가장 귀한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이 둘 중 무엇을 버리랴!
 
선생님의 우렁찬 외침을 읽을 때마다 기진한 저의 온 몸에는 뜨거운 피가 용솟음칩니다. 그 분은 이 다짐대로 살다 가셨습니다. 짧은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꿈도 믿음도 없는 하루살이 같은 나의 인생이여! 부끄럽도다.
 
(참고) 이 글은 박상익 교수(우석대)께서 원문의 어려운 한자를 한글로 옮기고 오자를 바로 잡은 것입니다.

긍휼, 이 어려운 단어의 뜻은?

사전에 긍휼(矜恤)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긍(矜)은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다>, <아끼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또한 <엄숙하다>, <공경하다>, <삼가다>, <숭상하다>, <자랑하다>, <위태롭다>의 뜻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뜻으로는 우리가 잘 쓰는 '긍지(矜持)를 가지다'할 때의 긍자와 같습니다.
 
휼(恤)은 <근심하다>, <굶주리는 백성을 먹이다>, <사랑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히 여겨 보살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긍휼이 성서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개역 한글] 성서에는 모두 169회나 쓰이고 있습니다. 처음은 출애굽기(33장 19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마태복음(5장 7절)에는 긍휼이 팔복의 하나라고 합니다. '긍휼이 여김'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9장 13절)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를 곧 이 긍휼에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바가 곧 긍휼이요, 우리가 그 긍휼을 행할 때에는 최고의 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좋은 단어 긍휼을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아마 크리스천이 아니면 모르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새로 번역된 성경들에는 대부분 이 단어가 <자비>로 고쳐져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김>이라는 뜻이니 자비 또한 긍휼과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대부분 pity 아니면 mercy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긍휼이라는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항상 세상과 이웃을 대할 때에 첫번째 자세는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김이며, 자비입니다. 이 긍휼을 잊으면 우리는 교만에 빠집니다. 이 긍휼이 몸 밖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산상수훈의 귀한 가르침을 놓치지 마십시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