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194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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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柱는 기독교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기독교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을 모르면 윤동주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위의 시에는 두 개의 장소가 서로 대립구조를 이루고 있다.
‘고향’과 ‘또 다른 고향’
그의 고향은 이 세상이다.
그의 또 다른 고향은 낙원이다. 하늘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풍진세계(風塵世界)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또는 우리)는 백골이다.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그래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백골이다.
어둠 속에서 풍화작용에 살점하나 남지 않은 백골은 에스겔(37장)에 나오는 골짜기에 누워있는 ‘마른 뼈들’이다.
나는 어두운 밤, 어두운 방에 누워있다. 창밖으로 별이 쏟아지며 망망한 우주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 때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하늘에서 나를 부르는 천사의 노래다. 세상에 한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시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아름다운 혼’은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영혼이다. 또 다른 고향, 곧 낙원으로 가려는 그의 영혼이다. 낙원은 ‘또 다른 고향’이라기보다는 원래 고향이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타향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세상도 사랑했다. 이곳에는 육신의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 그래서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러다보니 마지막에 돌아 가야할 본향을 ‘또 다른 고향’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백골과 아름다운 혼 사이에서 방황한다. 갈등에 울고 있다. 그의 눈물은 백골과 작별하고 또 다른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회개의 눈물이다. 아니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일지도 모른다.
어둔 방에서 번민하는 시인의 귀에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누군가의 집 앞을 나그네가 지나가나 보다. 도회지 사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광경을 잘 이해못할지도 모르겠다. 시골에서는 밤중에 인기척이 나면 개가 짖는다. 밤공기를 가르며 짖어댄다. 한 마리가 짖으면 동네 개들이 덩달아 여기저기서 짖어댄다.
시인은 곤한 밤을 깨우는 개 짖는 소리에서 이 물질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지조 높은 개’는 무엇인가? 잘난 체 우쭐거리며 살아가는 속물들이다. 썩어져갈 우상(偶像)들이다. 탐욕에 눈이 멀어 평생을 어둠 속에 살아가는 ‘아담의 후손들’이다. 개들이 짖어대는 시끄러운 소리는 밤새 그칠 줄을 모른다. 당연하다. 인간군상(人間群像)의 욕망에 어디 끝이 있으랴.
내가 사는 곳은 먹잇감을 두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개들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어둠을 벗어나야 한다.(‘지조 높은 개’를 애국지사라느니, 시인을 일깨우는 존재라느니 하는데 개는 돼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부정적인 동물로 취급된다. 좋은 시를 함부로 훼손하지마라. 시어에서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아무려면 고고한 지사를 개에 비유했겠나?)
시인은 어쩌면 dark(어둠. 어두운)와 bark(개가 짖다. 개 짖는 소리)를 나란히 놓음으로 은연중에 英文 운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시인은 길을 나서기로 한다. 쫓기듯이 서둘러서 길을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시인은 백골을 버리고 갈 수가 없다. 백골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가 없다. 시인은 그렇게 무정(無情)한 사람이 못된다.
그래서 백골 몰래 가기로 한다. 제발 백골이 깨지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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