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창조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짓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창작물이며, 그분의 의도대로 만들어졌다.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당연히 그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반하여 사람은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장구한 시간이 흘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앞의 논리를 ‘창조론’이라고 하고, 자기들의 논리를 ‘진화론’이라고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너무 상반되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둘 중에 하나가 참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올해(2010년)가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라고 한다. 초창기에 비록 혁명적인 발상이기는 하나 허술한 가설(假說) 같았던 진화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치밀한 과학적 논거를 바탕으로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말해 제2의 다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화론을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고고학, 인류학, 우주과학, 지질학, 생명과학 등이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신비를 속속 파헤치고 있으며,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창조론은 거의 설 자리를 잃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알았던 해와 달은 우주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생물들에게 살라고 주신 땅은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 불과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복제가 가능하며,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할 수도 있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생물을 만들 수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과 별로 여행할 수도 있고, 손바닥보다 작은 전화기로 언제 어디서라도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런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자들은 여전히 진화론은 허구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우긴다.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진위를 논할 생각이 없다. 그럴만한 과학적 지식도 부족하다. 추호도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생각 또한 없다. 다만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논쟁(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과 종교(신앙이라고 해도 좋다)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며,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창조론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의도를 자연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이사야 45:9)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토기장이와 진흙과 같다. 위의 말씀은 진화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창조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하지 않는다. 기분 나쁘지만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는다. 그들은 물질세계의 구성과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알고자 한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막지마라. 그것은 사탄의 사주도 아니며, 바벨탑을 쌓는 행위도 아니다.
물론 진화론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진화론에도 허점은 많다. 어쩌면 창조론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창조론으로 성경이 과학적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그 방주에는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 올려서 덮고, 방주의 옆쪽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서 세 층으로 만들어라.(창세기 6:14-16)
창조론자들은 물이 지구를 다 덮은 대홍수가 정말 있었으며, 따라서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위의 크기 정도면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종류별로 다 탈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지질 조사를 실시하고, 노아의 방주가 워낙 컸기 때문에 어딘가에 흔적이라도 남았을 것이라며 고고학적 탐사도 서슴거리지 않는다.
아서라.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그 옛날 타락한 세상에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했듯이 이 혼탁한 시대에도 의인은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곧 노아의 방주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달 덕분에 인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암의 정복도 멀지 않았고, 노화를 늦출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TV, 냉장고, 자동차, 비행기, 빌딩, 컴퓨터 등은 얼마나 더 발달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과학은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경을 빌미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진화론자들을 포함한 과학자들에게 부탁한다. 성경을 과학의 창을 통해 바라보지 말라.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픽션이라느니, 틀렸다느니 운운하며 트집을 잡아서도 안 된다. 성경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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