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1일 토요일

이런 놈이 목사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주여!
天罰을 내리소서!
미신으로 가득 찬 한국기독교에 天罰을 내리소서!
 
전남 보성에서 교회 목사가 독감에 걸려 숨진 자녀를 살린다며 수일째 내버려두다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2012211일 오전 950분께 전남 보성군 보성읍의 한 교회 사택에서 목사 박모(43)씨의 큰딸(10)과 각각 8, 5살 난 남동생 등 어린이 3명이 숨져 있는 것을 친척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박씨의 자녀는 지난 1월부터 감기 증상을 보였으나 병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안에서 기도를 받으며 방치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결과 큰딸은 지난 1일 오후 10시께 숨졌으며 아들(8)2일 오전 5시께, 둘째 아들(5)은 같은 날 오후 7시께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지난달 16일 둘째 아들이 감기 증세를 보이자 화순의 한 소아과에서 치료를 받게 했으며 나머지 아이들은 교회 근처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지어 먹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큰딸이 지난 1일 먼저 숨지자 기도를 하면 살아날 것으로 믿고 장례를 치르지 않은 채 열흘 넘게 기도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막내 자녀(1)의 신병을 보호하는 한편, 사인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부검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박씨와 아내 등 2명을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한 뒤 유기 치사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다.

창조론자가 카이스트 명예박사…'하나님' 나라의 자화상!

최근 10년 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과학 관련 책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흐름이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진화론과 신경 과학 관련 서적의 급증이다.
 
신경 과학 책이 과학 출판계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점은 이해가 가능하다. 뇌 과학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만드는 다양한 분석 및 진단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왔고, 그 분야로 몰린 과학자의 연구 성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 과학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배울 수 없었던 최근 지식이니 이 새로운 지식의 급증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허나, 진화론 관련 책의 급증에는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진화론을 배웠고, 대학 입시에서도 관련 문제를 풀어야 했으며, 진화론이 최근에 와서야 지식의 엄청난 축적이 일어난 분야도 아니기 때문이다. 뇌 과학 지식의 급증과 비교했을 때 진화론 지식은 새것에 대한 추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옛것에 대한 재발견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왜 우리 독자들은 지금 진화론 서적들을 읽은 것일까? (출판계가 팔리지도 않는 진화론 책을 마구 찍어내지는 않을 테니 이 질문은 성립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재밌으니까"가 일차적인 답이다. 하지만 조금 더 큰 틀에서 생각해보자. 이에 대한 대답의 단초를 나는 몇 년 전에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팀에게 들었다. <신과 다윈의 시대>라는 2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모 PD가 내게 질문했다.
 
"다큐를 위해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되는지 아십니까? 30퍼센트입니다. 그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내 즉각적인 대답은 이랬다. "종교적 이유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하는 말. "진화론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대답이 가장 많습니다. 이것은 대체 뭐죠?"
 
진화론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충격적인 조사였다. 대체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진화론에 대해 뭘 배우기(배웠기)에 이런 대답이 나왔을까? 잠시 눈을 감고 내 학창 시절의 생물학 시간을 회상해보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용불용설의 오류를 설명하기 위한 기린 그림,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헤켈의 발생반복설을 뒷받침한다고 알려진 배아 발생 그림, 개체군의 유전자 빈도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그래서 진화 관련 계산 문제에 자주 등장한다) 하디 와인버그 공식, 이것이 전부였다. 혹시나 해서 헌책방에 들러 최신 생물 교과서도 훑어보았으나, 역시나 근 20년 동안 우리 학생들이 진화론에 대해 배웠던 내용은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떠올린 내용들이 진화론의 핵심도 아니며 심지어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난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에른스트 헤켈의 그림은 과학사가에 의해서 명백한 조작으로 판명 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생물학 교과서에는 버젓이 '진화의 발생학적 증거'라는 항목으로 등장해왔다. (불행히도 이 날조된 그림은 우리 중학교 교과서와 일부 과학 도서에서 아직도 퇴출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대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은 어떤가? 대학에서 일반 생물학을 수강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이 있다. "이 부분(진화론)은 중·고등학교 때 이미 배웠으니 그냥 넘어갑니다. 진도가 많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우리는 진화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구닥다리 정보로 공부해야 했고 심지어 틀린 내용을 밑줄 치며 배워왔다. 이것이 한국의 진화론 교육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진화론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여론은 이상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진화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의 "진화론의 빛에 비추지 않고는 생물학의 어떤 것도 납득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지는 대목이고, 나처럼 진화론 연구와 소통이 업인 사람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진화학자들의 도움 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 교과서를 소신껏(?) 집필해온 과학 교육학자도 공범이 되는 순간이다. (내 주변에 있는 진화학자 중에 과학 교과서 집필에 불려간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과학 출판계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진화론 관련 서적들은 우리의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보충제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관계'의 맥락에서 진화론을 창조론과 대비시키는 책들은 또 다른 한국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009년에 실시한 EBS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개신교인 중에 60퍼센트 이상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 국민의 60퍼센트 정도가 "창조론도 진화론과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가?
 
한국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는 오늘도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들"이라는 황당한 기사가 메인 화면에 띄워져 있다. 이 단체는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하여 진화론을 거부하며 진화론이 창조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홈페이지에 나온 그들의 비장한 미션은, "복음 전파의 커다란 장애물인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밝히고 창조의 과학적 증거들을 드러냄으로써 창조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는 일"이다. 실제로 이 단체는 지난 30년 동안 교회와 학교 등지에서 활발한 '교육' 활동을 펼쳐왔고, 심지어 창조론의 관점으로 쓴 생물 교과서를 공인 교과서로 만들려는 시도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 단체를 창립하고 이끌어온 명예회장이 대학 교육 정책에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현재 회장이다. 게다가 그는 작년 이맘때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의 과학기술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공적으로 카이스트(KAIST)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조용했다.
 
단 한명의 교수만이 "사이비 과학을 촉진시키는 것이 주목적인 협회를 만든 사람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것은 카이스트의 모순"이라며 공식적으로 항의했을 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공계 대학 어디에서도 창조과학을 주창하는 사람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는 않는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진화론의 허구성을 밝히겠다"며 결성한 단체의 장을 대학 교육 정책의 수장으로 두지는 않는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던 분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창조론 선전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그 하이라이트! 얼마 전에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몇몇 일간지의 한 면을 도배한 어떤 개신교 목사의 광고물은 한국 개신교의 진화론 이해 수준을 정확히 드러내주는 경우였다. 그 목사는 "다윈의 학설처럼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도 어느 산속이나 정글에서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되는 과정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역사상 그것을 본 일이 없다"면서 진화론을 비판하고 창조론을 이야기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윈의 '생명의 나무' 개념만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질문인데, 그 큰돈을 써가며 신문에 광고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현재의 침팬지나 원숭이는 몇 백 만 년, 몇 천 만 년 전쯤에 인간과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현재 우리와) 사촌 종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으로 진화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론의 기본을 배운 초등학생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기초 지식마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전 세계 과학계에서 창조과학이 서 있을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보수주의 기독교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창조론(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은 단 한 번도 정식으로 과학 시간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가령, 지적 설계론 교육 여부를 놓고 5년 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벌어진 한 재판에서는 보수 기독교인인 판사마저도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딱 잘랐다. "논쟁이 있으니 창조론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자"라는 솔깃한 슬로건에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대체 논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치 "역사 해석에 논쟁이 있으니 한일 합병의 허구성도 함께 가르치자"라는 식의 황당한 제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기독교 세력이 전 분야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미국과 한국의 상황에서 창조론 운동은 뜨거운 감자 같은 것이다. 무시하자니 엉뚱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다뤄주자니 마치 그들과 동등한 논쟁 파트너가 되는 듯 하고. 이런 맥락에서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김명주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는 미국의 과학자들이 창조론(특히, 최근의 지적 설계론)에 대한 무시 전략을 버리고 한번 제대로 상대해주겠다는 뜻을 보여준 첫 번째 공식적인 문건인 셈이다.
 
이 책은 세계 지성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자로 불리는 존 브록만이 편집하고 16인의 세계적 석학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지적 설계론을 비판한 책으로서 생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물리학자들이 글을 썼다. 가령, 시카고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제리 코인, 터프츠 대학의 인지철학자 다니엘 데닛,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하버드 대학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가급이 참여했는데, 이런 필진들이 지적 설계론 하나만을 다루기 위해서 함께 힘을 합했다는 것만으로도 뉴스거리이다. 이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각각 다르지만 지적 설계론에 대한 입장은 한결같다. 지적 설계론은 사이비 과학이거나 기껏해야 저질 과학일 뿐이라는 것.
 
물론 과학과 종교의 관계 맥락에서 지적 설계론을 다룬 책들은 국내에도 이미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런 주제가 식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책인가? 이제 창조론을 다룬 책들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는데.' 내가 앞에서 한국의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진화론과 창조론 이슈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죽지 않았다. 이번 정권에 들어와서 더 심각해졌으며. 과학 교육의 관점에서도 더 많은 논의와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쟁점이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 식탁()의 음식들을 잘 소화해낸다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푸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진화론에 관심이 있거나 창조론 논쟁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일차적으로 권할만한 책이지만, 전국에 계신 모든 과학 선생님들께도 일독을 권해드린다. 창조론에 경도된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팁이 가득하다.
 
장대익(서울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2-02-10

2011년 9월 4일 일요일

창조론자들이여, 과학과 다투지 말라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창조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짓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창작물이며, 그분의 의도대로 만들어졌다.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당연히 그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반하여 사람은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장구한 시간이 흘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앞의 논리를 창조론이라고 하고, 자기들의 논리를 진화론이라고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너무 상반되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둘 중에 하나가 참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올해(2010)가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이라고 한다. 초창기에 비록 혁명적인 발상이기는 하나 허술한 가설(假說) 같았던 진화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치밀한 과학적 논거를 바탕으로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말해 제2의 다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화론을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고고학, 인류학, 우주과학, 지질학, 생명과학 등이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신비를 속속 파헤치고 있으며,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창조론은 거의 설 자리를 잃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알았던 해와 달은 우주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생물들에게 살라고 주신 땅은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 불과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복제가 가능하며,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할 수도 있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생물을 만들 수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과 별로 여행할 수도 있고, 손바닥보다 작은 전화기로 언제 어디서라도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런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자들은 여전히 진화론은 허구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우긴다.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진위를 논할 생각이 없다. 그럴만한 과학적 지식도 부족하다. 추호도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생각 또한 없다. 다만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논쟁(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과 종교(신앙이라고 해도 좋다)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며,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창조론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의도를 자연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이사야 45:9)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토기장이와 진흙과 같다. 위의 말씀은 진화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창조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하지 않는다. 기분 나쁘지만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는다. 그들은 물질세계의 구성과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알고자 한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싶어 안달이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막지마라. 그것은 사탄의 사주도 아니며, 바벨탑을 쌓는 행위도 아니다.
 
물론 진화론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진화론에도 허점은 많다. 어쩌면 창조론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창조론으로 성경이 과학적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그 방주에는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 올려서 덮고, 방주의 옆쪽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서 세 층으로 만들어라.(창세기 6:14-16)
 
창조론자들은 물이 지구를 다 덮은 대홍수가 정말 있었으며, 따라서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위의 크기 정도면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종류별로 다 탈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지질 조사를 실시하고, 노아의 방주가 워낙 컸기 때문에 어딘가에 흔적이라도 남았을 것이라며 고고학적 탐사도 서슴거리지 않는다.
 
아서라.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그 옛날 타락한 세상에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했듯이 이 혼탁한 시대에도 의인은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곧 노아의 방주이다.
 
우리는 과학의 발달 덕분에 인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암의 정복도 멀지 않았고, 노화를 늦출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TV, 냉장고, 자동차, 비행기, 빌딩, 컴퓨터 등은 얼마나 더 발달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과학은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경을 빌미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다.
 
진화론자들을 포함한 과학자들에게 부탁한다. 성경을 과학의 창을 통해 바라보지 말라.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픽션이라느니, 틀렸다느니 운운하며 트집을 잡아서도 안 된다. 성경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